오늘의 한자공부 - 吾
吾
1. 나
2. 그대
3. 우리
4. 글 읽는 소리
5. 짐승의 이름
6. 막다, 멈추게 하다
a. 친하지 않다 (어)
b. 친하려고 하지 않다 (어)
c. 소원(疏遠)한 모양 (어)
d. 땅의 이름 (아)
여기서의 "나"는 여러명의 서로 다른 성향의 나를 의미하였다.
어떤 나는, 계집질, 오입질을 좋아할 것이고
어떤 나는, 학문질, 글질을 좋아할 것이고
어떤 나는, 영화질, 감상질을 좋아할 것이었다.
인간, 사람에게 있어서, "나"란, 통일된 그 무엇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간단계에서는, 수도 없이 분열된 다중적 의식체로서의 내가 존재하였다.
앞서서 공부한 바와 같이, 予 란, "타인을 나로서 인식하는 나를 의미하지만" 吾란, "다중적인격체, 다중적의식체로서의 또 다른 나의 여러가지 면모들을 의미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이건희, 이재용이 같이, 도둑질, 강도질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고 싶어하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인정되고 싶은 일면적 표현으로서의 나를 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余와 같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余란, 자기자신을 자기자신으로 나타내고 싶어하는 사람(사회적,국가적,제도적,관습적으로 허용되어지는 범위내에서, 칭찬받는 방향으로서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측면)으로서의 나에 가깝고
予란, 나보다 나은 사람, 나보다 훌륭해보여지는 사람을 "나로서 인식하는 측면이라 하겠다. 이는 국가, 사회, 제도, 관습, 문화, 학업등과 같은 다면적 측면에서,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거나, 모범적이라거나, 여러 다른 보통사람들보다 높아 보여지는 사람들로서 "나를 인식하는 측면, 즉, 부처를 나로 인식하는 측면 = 중, 스님들, 예수를 나로 인식하는 측면 = 교황, 목사, 신부, 수녀들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원본래적 측면들은, 부처나 예수의 단계가 물론 아니므로, 그들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교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나, 다만, 그들이 예수나, 부처를 그들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러한 나를 予로 표현한 것이 한자의 오묘함이라 할 것이며, 이는 유럽의 대학자 칼 융을 능가하는 오묘한 이치를 설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었다.
人之常情 이란 이와 같은 인간의 다중적, 다면적 특성을 잘 설파한 단어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로는 절개가 곧고, 뜻과 의지가 강하고 높은 사람일수도 있으며, 세상의 온갖 유혹과 사탕발림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그러한 측면들은, 또 다른 의식의 단계에서는, "미친듯이 그 사탕을 먹어보기를 갈구하는 또 다른 성향으로서의 내가 존재할수도 있음"을 의미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존재는,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정의될 수 없으므로, 이런 단계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고, 저런 단계에서는 저런 주장을 하는 복합적 의식체, 복합적, 다중적, 다면적 의식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인지상정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사람과 인간의 이러한 측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므로, 그들이 모두 한자공부를 해 볼 것을 지시명령 처리규율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 아로서, 그 많은 것들중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선택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간다고 해도, 인간의 단계에서, 가시밭길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러한 길을 가더라도, 그러한 길을 가는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상정으로서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사람으로서, 인간단계의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苦痛과 忍耐의 길을 걸어보지 아니한 자들은, 보다 높은 세계로 갈 자격이 없는 것으로 處理規律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단계를 졸업하는데에는 천만년의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처리규율되었다. 이는 플레이아데스규율제1조, ANA-PLEIADES규율제1조로서 처리규율되었다.
여기서의 "나"는 여러명의 서로 다른 성향의 나를 의미하였다.
어떤 나는, 계집질, 오입질을 좋아할 것이고
어떤 나는, 학문질, 글질을 좋아할 것이고
어떤 나는, 영화질, 감상질을 좋아할 것이었다.
인간, 사람에게 있어서, "나"란, 통일된 그 무엇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간단계에서는, 수도 없이 분열된 다중적 의식체로서의 내가 존재하였다.
앞서서 공부한 바와 같이, 予 란, "타인을 나로서 인식하는 나를 의미하지만" 吾란, "다중적인격체, 다중적의식체로서의 또 다른 나의 여러가지 면모들을 의미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이건희, 이재용이 같이, 도둑질, 강도질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외면적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고 싶어하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인정되고 싶은 일면적 표현으로서의 나를 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余와 같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余란, 자기자신을 자기자신으로 나타내고 싶어하는 사람(사회적,국가적,제도적,관습적으로 허용되어지는 범위내에서, 칭찬받는 방향으로서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측면)으로서의 나에 가깝고
予란, 나보다 나은 사람, 나보다 훌륭해보여지는 사람을 "나로서 인식하는 측면이라 하겠다. 이는 국가, 사회, 제도, 관습, 문화, 학업등과 같은 다면적 측면에서,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거나, 모범적이라거나, 여러 다른 보통사람들보다 높아 보여지는 사람들로서 "나를 인식하는 측면, 즉, 부처를 나로 인식하는 측면 = 중, 스님들, 예수를 나로 인식하는 측면 = 교황, 목사, 신부, 수녀들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원본래적 측면들은, 부처나 예수의 단계가 물론 아니므로, 그들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교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나, 다만, 그들이 예수나, 부처를 그들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러한 나를 予로 표현한 것이 한자의 오묘함이라 할 것이며, 이는 유럽의 대학자 칼 융을 능가하는 오묘한 이치를 설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었다.
人之常情 이란 이와 같은 인간의 다중적, 다면적 특성을 잘 설파한 단어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로는 절개가 곧고, 뜻과 의지가 강하고 높은 사람일수도 있으며, 세상의 온갖 유혹과 사탕발림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그러한 측면들은, 또 다른 의식의 단계에서는, "미친듯이 그 사탕을 먹어보기를 갈구하는 또 다른 성향으로서의 내가 존재할수도 있음"을 의미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존재는,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정의될 수 없으므로, 이런 단계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고, 저런 단계에서는 저런 주장을 하는 복합적 의식체, 복합적, 다중적, 다면적 의식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인지상정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사람과 인간의 이러한 측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므로, 그들이 모두 한자공부를 해 볼 것을 지시명령 처리규율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와 아로서, 그 많은 것들중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선택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간다고 해도, 인간의 단계에서, 가시밭길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러한 길을 가더라도, 그러한 길을 가는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상정으로서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 사람으로서, 인간단계의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苦痛과 忍耐의 길을 걸어보지 아니한 자들은, 보다 높은 세계로 갈 자격이 없는 것으로 處理規律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단계를 졸업하는데에는 천만년의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처리규율되었다. 이는 플레이아데스규율제1조, ANA-PLEIADES규율제1조로서 처리규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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